검색결과
' 이재오'에 대한 통합 검색 결과 : 전체 199건
-
문서사료 98건
-
사진사료 80건
-
- 범민족대회 허용을 위해 통일원장관을 찾아간 이재오, 오충일
-
등록번호 : 00717704
날짜 : 1989.02.20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이재오 조국통일위원과 오충일 전민련공동의장이 20일 상오 이홍구 통일원장관을...
-
- 분단 42주년 극복을 위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한 장을병, 이재오, 박현채
-
등록번호 : 00701801
날짜 : 1987.08.15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
- 김대중 민주당 고문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재오
-
등록번호 : 00702100
날짜 : 1987.10.05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
-
영상사료 1건
-
박물사료 1건
-
사료 콘텐츠 2건
-
- 그 해 겨울의 내의 한 벌-엠네스티 한국위원회
-
요약설명 : 접어들면서 불행한 사태가 연달아 발생하였다. 이재오 사무국장이 가톨릭 농민회 주최 안동 집회에 나가 정부를 비판하였다 하여 구속되었는가 하면, 카톨릭 안동교구 사목국장이자 우리 모임의 이사인 정호경 신부가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 뿐인가. 우리 이사이자 전북 지부장인 백윤석 목사, 전주 지부 회원인 김경섭 목사, 역시 우리 이사인 문동환 목사, 이문영 교수 등이 시국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구속되었다. 우리 회원인 문정현 신부가 검찰의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되었는가 하면, 부산지부의 노경규, 조태원 두 간부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실형선고를 받았다. 이사인 백낙청 교수도 구류처분을 받았고, 아카데미...
-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채록사업(2차년도) 완료
-
요약설명 : 방화사건 관련자 3명의 구술 8시간을 채록했다. 구술자들은 다음과 같다. <유화국면 이전 민주화운동 주요사건>[남민전사건] 심영호, 이재오, 임헌영, 최평숙 / [무림사건] 김명인, 현무환 / [학림사건] 이선근, 신철영 / [부림사건] 송병곤, 최준영, 장상훈 //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 임종수, 윤종형, 박시영 <70년대 민주노조와 5.17 이후 정화조치(2)>는 2018년 구술 <5.17 이후 정화조치> 중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1)] 관련자 8명 구술에 이어지는 구술로, 70년대 민주노조 관련자와 JOC, 크리스찬아카데미 활동가 등 12명의 구술 41시간을 채록했다. 구술자들은 다음과 같다.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
-
구술 아카이브 2건
-
일지사료 15건
-
- 4·19 4주년 기념식 전국 각처에서 거행 한국학생총연합회에서는 시국선언문 채택
-
일자 : 1964.4.19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2001, 420쪽. 이재오, 『한일관계사의 인식Ⅰ-한일회담과 그 반대운동』, 학민사, 1984, 222~223쪽) 한국민주화운동사와 6·3학생운동사에서는 한학련이 미발족 조직으로 나오나, 이재오는 64년 3월 결성된 조직으로 기술. 신문기사에서 한학련이 실재하는 조직처럼 여러 번 보도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결성된 것으로 보았다. 『대학신문』 6월 29일에는 결성단체로 설명.(『대학신문』 1964.6.29 7면)에서 주최한 독자적인 기념식이 시청 앞에서 각각 열렸다. 시청 앞에서는 17개교 남녀대학생 1,000여 명경향신문에는 12개 대학, 2,000여 학생들로 보도되었으며, 『6·3학생운동사』에는 5,6개 대학, 3,000여 명으로 기술되었다.(『경향신문』...
-
-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 준비과정 밝혀져
-
일자 : 1964.5.25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함으로써 대규모 항쟁의 여지를 열어놓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재오는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 대중에 기반을 갖지도 못한 조직이 운동 고유의 흐름을 냉각시켰으며, 주최 측의 나약함과 구호의 산발 등으로 대학가 여론의 효과적 집약에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요시자와 후미토시 역시 이 궐기대회는 결과적으로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다만 5·20 시위를 주도한 급진적 지도자가 잇달아 구속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온건파인 이들이 반대운동을 계속 이어갔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그 한계와 의의를 지적하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23~430쪽. 이재오,『한일관계사의 인식Ⅰ-한일회담과 그...
-
- 전남대생, “박정권 하야”를 외치며 데모
-
일자 : 1964.5.2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져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이들은 뒤늦게 온 200여 명 학생의 증원을 얻어 다시 경찰과 충돌, 투석전을 벌였으며, 경찰은 10여 명을 연행했다. 연행된 학생의 즉각 석방을 요구, 도청 앞에서 연좌하던 데모학생들은 12시 30분쯤 연행되었던 학생 전원이 석방되자 퇴진하기 시작했다. 이날 10여 명의 학생들이 부상당했다.『경향신문』 1964.5.27 석3면, 『동아일보』 1964.5.27 석7면, 『전남매일신문』 1964.5.28 4면. 이날 전남대 시위에서는 시위 구호로서 ‘박정권 하야’가 최초로 등장했다. 야당권에서의 박정희 하야 요구는 이미 있어 왔다.(이재오, 『한일관계사의 인식Ⅰ-한일회담과 그 반대운동』, 학민사, 1984, 206쪽)
-